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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=건립=== | | ===건립=== |
| − | 파평면 율곡리 일대는 조선 초기에 덕수 이씨 가문의 터전이다. 1932년에 태어난 이명신은 22살인 1414년부터 관직에 올랐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별장을 짓고 임진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도 지었다. | + | 화석정이 소재한 파평면 율곡리 일대는 조선 초기에 덕수 이씨 가문의 터전이다. 율곡의 5대 할아버지인 이명신(1368~1435)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1443년에 별장을 짓고 임진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도 지었다.<ref>경기문화유산원, 문화유산</ref>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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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===손자 이의석 복원=== | + | ===손자 이의석 중건=== |
| − | 이명신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얼마 후에 곧 폐허가 되자 이명신의 손자인 이의석은 조부가 세운 정자를 새로 지었다.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다. | + | 이명신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얼마 후에 곧 폐허가 되자 이명신의 손자인 이의석이 조부가 세운 정자를1480년 경 새로 지었다.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다.<ref>차문성. 울곡, 화석정에서 만나다. 2024.8.24 인문학강좌</ref>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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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=후손 복원=== | | ===후손 복원===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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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주요 시설== | | ==주요 시설== |
| | ===정자=== | | ===정자=== |
| | + | [[File:pk1929화석정.jpg|400px|섬네일|1937년 전경,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= 京畿地方の 名勝史蹟]] |
| |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유림들에 의해 복원한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로 정면 3칸,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(初翼工)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. | |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유림들에 의해 복원한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로 정면 3칸,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(初翼工)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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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1929년 일제시대에 촬영된 사진에는 사방의 벽면을 목재로 마감한 것으로 나타난다. | + |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사방의 벽면을 목재로 마감한 것으로 나타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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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정자 입구에는1973년 유적지 정화사업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팔세부시를 현판으로 기록해 부착되어있다. | + | 정자 입구에는1973년 유적지 정화사업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화석정시(팔세부시)를 현판으로 기록해 부착되어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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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=화석정 시비 === | | ===화석정 시비 === |
| | + | [[File:pk화석정시.jpg|400px|섬네일|화석정시 현액]] |
| | 율곡이 8세 때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花石亭詩(화석정시), 혹은 팔세부시 (八歲賦詩)라고 전해지는 이 작품은 화석정에 큰 표석(標石)으로 세워져 있으며 율곡이이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시로 평가되어 왔다. | | 율곡이 8세 때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花石亭詩(화석정시), 혹은 팔세부시 (八歲賦詩)라고 전해지는 이 작품은 화석정에 큰 표석(標石)으로 세워져 있으며 율곡이이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시로 평가되어 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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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율곡이 화석정 시를 지었다는 것은 김장생(金長生)의 시문집인 사계전서 [沙溪全書] 제 6권,/ 심전고 [心田稿] 제 1권 / 율곡전서 제 1권/ 송시열의 시문집 송자대전([宋子大全] 등의 문헌에 나오므로 이를 근거로 삼았다. <ref>블로그 국수, https://blog.naver.com/pctoolsay/20190299299</ref> | + | 율곡이 화석정 시를 지었다는 것은 김장생(金長生)의 시문집인 사계전서 [沙溪全書] 제 6권,/ 심전고 [心田稿] 제 1권 / 율곡전서 제 1권/ 송시열의 시문집 송자대전([宋子大全] 등의 문헌에 나오므로 이를 근거로 삼았다. <ref>블로그 국스, https://blog.naver.com/pctoolsay/20190299299</ref>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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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*화석정 시문 | | *화석정 시문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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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=수목=== | | ===수목=== |
| − | 정자 옆에는 192.1.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마을나무로 지정 18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있다.[[지정_보호수| 파주시 지정보호수 목록]] | + | 정자 옆에는 1982.1.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마을나무로 지정된 18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있다.[[지정_보호수| 파주시 지정보호수 목록]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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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주변 시설== | | ==주변 시설== |
| | ===37번 국도 관통=== | | ===37번 국도 관통=== |
| − | 서울국토관리청은 화석정과 47m 정도 이격된 임진강변을 따라 37번 국도를 개설을 추진했다. | + | 1990년대 말 서울국토관리청은 화석정과 47m 정도 이격된 임진강변을 따라 37번 국도의 우회도로 개설을 추진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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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+ |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보호법 제20조에 따라 문화재 보호구역 내 형상 변경 허가가 필요했다. 경기도 지방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화석정 주변에 대한 보존을 결정하고 노선을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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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화석정은 경기도 문화재로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보호법 제20조에 따라 문화재 보호구역 내 형상 변경 허가가 필요했다 . 경기도 지방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화석정 주변에 대한 보존을 결정하고 노선을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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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서울 국토관리청은 도로법상 도로의 곡선반경 문제로 노선 변경을 거부하며 예산을 다른 곳으로 전용할 가능성을 언급했다. | | 서울 국토관리청은 도로법상 도로의 곡선반경 문제로 노선 변경을 거부하며 예산을 다른 곳으로 전용할 가능성을 언급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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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파주시는 지역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우려해 경기도지사에게 재심의를 요청했고, 현장 확인 후 경기도 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터널을 뚫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. 그러나 터널 건설이 가능한지와 군사시설보호구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. | | 파주시는 지역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우려해 경기도지사에게 재심의를 요청했고, 현장 확인 후 경기도 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터널을 뚫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. 그러나 터널 건설이 가능한지와 군사시설보호구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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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파주시는 논쟁 끝에 화석정의 절개지를 보완하는 조건으로 당초 계획대로 37번 국도를 개설하게 했다. <ref>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-나는 파주인-,http://www.pajuiyagi.com/2016/10/03/문화재화석정옆을-지나가는-37번-국도-제25화/ </ref> | + | 파주시는 논쟁 끝에 화석정의 절개지를 보완하는 조건으로 당초 계획대로 공사를 추진했고 2000.11.21일 37번 국도의 노선 중 문산읍 당동리-파평면 율곡리 6.1km 구간을 확장 개통하고 기존 4.7km 구간을 폐지했다. <ref>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-나는 파주인-,http://www.pajuiyagi.com/2016/10/03/문화재화석정옆을-지나가는-37번-국도-제25화/ </ref>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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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==여론 여담== | | ==여론 여담== |
| | ===임진왜란 화석정 소각설=== | | ===임진왜란 화석정 소각설=== |
| | + | [[File:pk-임진나루거리.jpg|400px|섬네일|임진나루 주변 위치도]] |
| |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지만 일몰이 시작되고 비가 내려 임진강을 건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. 이때 율곡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시켜 정자 기둥에 들기름을 매일 발랐던 화석정을 블태워 그 불 빛으로 임진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. | |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지만 일몰이 시작되고 비가 내려 임진강을 건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. 이때 율곡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시켜 정자 기둥에 들기름을 매일 발랐던 화석정을 블태워 그 불 빛으로 임진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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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나루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려 길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남쪽 승청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무사히 동파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. | |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나루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려 길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남쪽 승청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무사히 동파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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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화석정을 소각했다는 일화는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 예견이 임진왜란으로 현실화되자 율곡의 혜안을 존경하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와같은 일화가 구전된 것으로 본다. 우리문화신문 2013.9.12. 권효숙기자 , 율곡이이의 임진강 화석정 | + | 화석정을 소각했다는 일화는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 예견이 임진왜란으로 현실화되자 율곡의 혜안을 존경하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와같은 일화가 구전된 것으로 본다. <ref>우리문화신문 2013.9.12. 권효숙기자 , 율곡이이의 임진강 화석정</ref>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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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− | ===화석정시 작가 진위 여부 === | + | *[https://fridge.paju.wiki/books/70c63/page/19ca1 화석정 소각설 논쟁에 빠져-이기상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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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| + | ===화석정시 작가 진위 논란 === |
| | 노산 이은상( 1903~1982) 선생은 1934년 임진강 적벽을 유람한 뒤 쓴 ‘적벽유’에서 “‘팔세부시’는 율곡 이이 선생 작품이 아니라, 창녕지역이나 성씨와 관련된 문인인 ‘창녕후인 매연거사’라는 익명의 시인이 지었다”고 기록했다. | | 노산 이은상( 1903~1982) 선생은 1934년 임진강 적벽을 유람한 뒤 쓴 ‘적벽유’에서 “‘팔세부시’는 율곡 이이 선생 작품이 아니라, 창녕지역이나 성씨와 관련된 문인인 ‘창녕후인 매연거사’라는 익명의 시인이 지었다”고 기록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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